광해군과 인조…병자호란의 교훈

선조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당시 임금을 대신하여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며 전장을 누빈 광해군…그는 임진왜란을 통해 피비릿내나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으며 힘에 의한 국제적 역학관계를 몸소 체험한 군주이다.

정실왕후의 아들이 아닌 후궁의, 그것도 둘째아들인 그는 국왕에 즉위하는 것부터 정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들게 즉위하였다.

국제관계라는 것은 명분보다는 힘의 논리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17세기 초반 날로 강성해지는 후금(청)과 전통적 맹방이자 임진왜란에서 구해준 명 사이에서 광해군의 조선은 줄타기 외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명과 청이 중요한 결전을 벌이자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조선으로서도 엄청난 출혈에 가까운 10000명의 지원군을 명나라에 파견한다. 이미 환관정치의 폐단과 부패한 명나라정권은 그 수명을 다해가는 상태였다. 광해군은 지원군 대장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명과 함께 후금에 대항하여 싸우되 전세가 불리해지면 청에 투항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국 조선군도 분투하였으나 명군이 패하자 10000명중 절반이 전사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청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강홍립은 조선은 청과 싸울 이유가 없다. 다만 명이라는 강대국과의 관계때문에 부득이하게 지원에 나서게 되었다는 광해군의 밀지를 청에 전달했다.

명 역시 광해군의 10000명이나 되는 지원군의 고군분투에 감사하여 광해군을 철썩같이 믿었다.

광해군의 대 명/청 등거리 외교는 우리 역사상 외교사의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된 조선이 또다른 정복세력 청에 짓밟히는 것을 면하고 나라를 구한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후궁의 아들로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반대파의 끝없는 도전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으며 특히 선조가 왕후가 죽자 광해군 자신보다도 어린 나이의 왕후(인목대비)를 다시 맞아 아들까지 낳게되자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켜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계축화옥). 물론 대북파와 소북파 사이의 권력암투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이 두가지 사건 즉, 명을 배신한 행위와 계축화옥 두 사건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쿠데타 즉, 인조반정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인조반정의 서인세력들은 쿠데타의 명분이었던 명분론에 빠져 숭명반청정책으로 돌아섰고 이로 인해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드디어는 병자호란까지 겪고 결국 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항복의식을 하는 치욕까지 겪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숭상하던 명은 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오늘날 한반도가 처한 위치는 이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미국과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 그리고 점차 세력이 강해지는 중국…

대한민국 혼자서는 이 쟁쟁한 외부세력을 당해내기 힘들다. 특히나 수출로 먹고사는 외부에 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여하튼 간에 주변세력과 연대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보장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택할 것인가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등거리에서 주변의 모두와 친해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마치 광해군이 했던 일 처럼 말이다.

몇년전에 이라크에 미국와 영국 다음으로 많은 3600명이라는 자이툰 부대가 파견된 일이 있다. 이정도면 아랍계로 부터 테러를 당해도 여러차례 당했을 수준이지만 그들에게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온 것이며 도우러 왔다는 이미지를 강하게 인식시켜 적대감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으로 부터도 점수를 따고 아랍으로 부터도 적대감을 불식시킨 성공적인 외교의 예이다. 자이툰 부대는 현대판 ‘강홍립 부대’인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와 일본의 재무장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병자호란의 교훈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