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리뷰 – 인간에 대한 이해 혹은 오해

 

영화 박쥐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뱀파이어’ 이야기를 해보자.

지구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명체는 생태계라는 큰 그림판에 절묘하게 자신을 끼워맞춰 그 생태계의 일부가 된다. 그들은 먹고 먹히는 관계 속에서 자연의 질서를 거부하지 않는다. 사자와 호랑이 같이 먹이사슬 위쪽에 자리 잡은 맹수조차도 죽으면 하이에나와 독수리 그리고 작은 곤충들과 식물들에게 자기 몸을 준다. 그래서 생태계에는 선악이 없다. 염소를 잡아먹는 늑대를 악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흡혈귀’라는 존재 (그것이 상상 속에만 존재하기는 하지만)는 다르다. 타인의 피를 갈취하여서만 생존가능하며 불사의 존재인 탓에 생태계 사슬에서 비켜있다. 그러므로 어느 구누한테도 자신의 몸을 주지 않는다. 흡혈귀는 오직 포식자의 위치에만 있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기에 흡혈귀만큼 위험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흡혈귀가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메타포를 제공하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그 메타포는 인간 자신일 확률이 크다. 앞서 설명했든 흡혈귀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할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막강한 도구와 지식을 무기로 이 생태계에서 오직 포식자로만 존재한다. 오직 자연을 갈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며 더이상 취할 것이 없을 때에는 황폐한 자연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자연에게 인간은 죽지 않고 피를 빨아먹으며 사는 흡혈귀보다 더 두려운 존재일지 모른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중에 자연의 피를 빨아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인간은 문명의 달콤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 달콤한 흡혈의 유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박쥐에는 정말 흡혈귀 같은 인간들이 나온다. 불륜 상대를 이용해 살인을 계획하는 여자, 그 여자를 마음대로 조롱하고 이용하는 시어머니, 그 시어머니에게 딱 어울리는 아들. 그런데 하필이면 박찬욱은 흡혈귀 역할로 성직자를 택한다. 여기에서 영화 박쥐의 철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에덴 동산에서 사과를 먹기 전까지 인류에게 선악의 구별이 없었다는 성경 내용을, 흡혈귀 신부라는 은유로써 통찰한 것이다.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 모기나 거미는 악일까? 양이나 염소는 선일까? 우리는 흔히 위선적 악인을 비유할 때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한다. 하지만 생태계에서 늑대는 악이 아니다. 늑대가 사라지면 양의 개체수가 필요 이상 늘어나 생태계의 균형은 깨지고 만다. 선악이란 개념은, 정의와 선을 추구한다는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윤리성과 도덕성에 의해서 비로서 정립됐으며 동시에 파괴됐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성직자, 그는 선일까? 유사 이래로 정의의 편을 자처한 숱한 역사, 하지만 그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왕정 사회에서 정의는 왕에게 충성하는 일이다. 의회주의에서는 법치가 정의이다. 다시 공산주의에서는 계급 타파가 정의이다. 그들은 서로 피를 튀기며 싸우고 정의를 부르짓으며 동시에 정의를 짓밟는다.

 

흡혈귀가 된 신부는 점차 흡혈귀의 힘을 이용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힘을 탐한다. 또한 사랑한다던 애인과 그 힘 때문에 대립한다. 인간이 파괴하는 대상, 착취하는 대상은 자연만이 아니다. 인간은 끝없이 권력과 돈을 탐하여 그로 인해 얻은 힘으로 다른 인간을 파괴한다. 욕망은 끝이 없으며 아무리 피를 마셔도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 욕망이 욕망을 부르고 피가 피를 부르는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왕은 백성의 피를 빨고 영주는 농노의 피를 빨고 자본가는 노동자의 피를 빨고 제국주의 국가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의 피를 빨았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 흡혈의 역사이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박쥐를 통해 인간을 조롱한다. 영화 초반부에 ‘백인과 아시아 남성에게만 걸리는 바이러스’라는 은유를 통해 이 세상의 권력을 가진 자들을 조롱한다.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신부가 결국은 자기 목숨을 연명하려고 병원 바닥에 누워 피를 마시는 장면으로 ‘인간의 구차한 정의감’을 조롱한다. 한때는 힘이 없어 피해자였지만 흡혈귀의 힘을 얻자마자 마음껏 힘을 남용하는 여자를 통해 조건만 충족하면 언제든 흡혈귀로 변화할 모든 인간을 조롱한다.

 

영화 박쥐는 인간에 대해 통찰한다. 그래서 불편하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나 한국의 조폭 코메디는 인간에 대해 어떤 것도 성찰하지 않고 다만 말초 감각을 자극하여 관람료를 뜯어낸다. 그래서 불편하지 않다. 그 불편하지 않음 덕분에 우리는 실컷 흡혈귀의 힘을 탐하거나 그 힘에 희생된다. 제 아무리 괴물같은 인간일지라도 – 연쇄 살인마나 학살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스스로를 추한 모습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박쥐는 잔인하게도 우리를 정직한 거울 앞에 세운다. 그 사실이 영화 내내 계속 된 피 튀기는 장면보다도 더 섬뜩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거울을 외면하고 싶다. 외면하고 싶은 그만큼 이 영화의 가치는 빛이 난다. 아무쪼록 칸 영화제에서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덧붙여.

영화 박쥐에 대한 수많은 리뷰를 봤다. 안타까운 사실은 취향과 비평의 차이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영화 박쥐가 싫든 좋은 그건 개인의 차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은 문화적 다양성이 없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폐쇄적 문화 현상이다. 그 모습이 좀 씁쓸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