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변할 수 없는 네가지 이유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10월2일. 청와대는 워싱턴에서 온 ‘귀한 손님’을 맞는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오랫동안 북한과 대화를 안 해 속을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의 방북지시를 받은 켈리가 평양행을 하루 앞두고 청와대를 찾아온 것이다.

반갑지 않을 리 없다. 미국이 새로운 대북제안을 준비한다는 소식도 이미 들었던 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안보문제를 담당했던 한 핵심인사는 이런 정황 때문에 일이 다 잘 풀릴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정작 켈리를 만나보니 그의 표정이 밝지 않았습니다. 여러 명의 대표단과 함께 만나야 했는데 ‘북한에 해줄 말’이라며 이미 적어온 글을 줄줄이 읽더라고요. ‘우리는 협상하러 북한에 가는 것이 아니다, 경고하고 통보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더군요.”

이것이 바로 제2차 북핵위기의 시작이다. 켈리는 평양에서 농축우라늄 핵무기계획을 폭로했고, 이후 북·미관계는 대화가 아니라, 대결로 치달았다. 뭐가 잘못됐던 것일까. “딕 체니를 비롯한 네오콘들이 켈리가 서울 오기 이틀 전쯤 (북·미대화 방안을) 뒤집어놓았다고 합니다.” 핵심인사의 설명이다.

– 대북대화의 모순적 자세 –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2005년 9월19일 베이징 6자회담 때다. 극적으로 북핵해결의 기본원칙을 담은 공동성명이 나왔다. ‘적절한 시기에 대북경수로 제공을 논의한다’는 합의도 도출했다. 경수로 제공시점은 북핵폐기가 이루어지고 국제원자력기구의 안전조치를 이행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온다는 것에 한·미간에 공감하고 있었다. 북측대표가 남측에 “적절한 시점이 언젠가?”를 물었을 때도 그렇게 대답을 해줬다.

그러나 곧 뒤죽박죽이 되었다. 19일 마지막 발언순서에서 크리스토퍼 힐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한 발언 때문이었다. 힐은 그답지 않게 미리 써준 글을 읽어 내려갔다. 북한이 먼저 핵을 완전 폐기하지 않으면 경수로는 어림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3년 전의 켈리처럼 힐도 낙관적 분위기를 산산이 부숴버린 것이다. 한 남측 참석자는 갑자기 강경해진 힐의 발언에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또 네오콘이 개입해 뒤집은 게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네오콘은 곧 여세를 몰아 북한인권 공세, 대북 금융제재로 북한의 목을 죄어들어 갔다. 그래도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금융제재 문제를 다룰 양자협의를 제의했다. 그러나 미국은 ‘설명해줄 수는 있어도 협상할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이래도 부시 2기 행정부가 1기 때보다 개선됐다고 할 수 있을까. 2기에도 계속되는 네 가지 행태를 보면 답은 분명하다. 첫째, 대화하되 협상하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원칙’의 고수이다. 협상은 시늉일 뿐 기본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둘째, 뭔가 진전을 볼 수 있는 결정적 시기, 전환기적 상황이 오면 네오콘이 개입해 강경모드로 전환시킨다. 셋째, 선후를 따지면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한 시점에 기어코 선후를 따진다. 넷째, 중요한 순간에 미국 협상대표에게 미리 써준 것만 읽게 함으로써 운신의 폭을 제한한다.

물론 ‘북한은 주권국가’라느니, ‘미스터 김정일’이니 하며 가끔 말을 다듬어 사용하는 점은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처럼 언제라도 북한을 ‘범죄정권’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에게 그런 수사학은 솜털 같은 무게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들이다. 사실 그런 것은 변화라기보다 혼란스러움이라고 규정해야 마땅하다.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 폭정, 범죄정권으로 규정했다면, 대화와 외교란 말은 꺼내지도 말아야 한다. 침공하거나 봉쇄하고 제재하면 그만이다.

– 외교적 해결 슬로건 뿐 –

그런데 대화와 외교적 해결이란 슬로건을 버리지도 않는다. 북한과 대화도 않겠다고 하다가, 다시 대화하되 협상은 않는다고 하더니, 협상하는가 싶으면 원점으로 돌아가곤 하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제는 힐이 나서서 “내가 진짜 강경파”라고 하는데 더이상 할말이 없다. 부시 행정부가 이 네 가지에 집착하는 한 공동성명이 나올 수는 있어도 그것을 이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태도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우선 바뀌어야 할 것은 부시 행정부다. 버시바우 대사는 자신의 한글 표기를 자기판단대로 ‘브시바우’로 사용하다가 최근 한국인들이 ‘버시바우’로 부르자 이를 따라 바꿨다. 부시 대통령도 한반도정책을 이렇게 바꿔보기를 권한다.

이대근/ 국제부장